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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 전쟁: 민족의 생존을 건 세 차례의 대결

hiswilln 2025. 3. 29. 19:46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 자주성과 생존, 그리고 동북아시아 질서를 둘러싼 대전략의 충돌이었다.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은 고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강인한 자주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전쟁 (993년)소손녕과 서희, 외교의 승부

1차 전쟁의 배경은 신라 멸망 이후 혼란스러웠던 동북아의 세력 재편 속에서 비롯되었다. 요(거란)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후 동북아 패권을 쥐고자 하였고, 고려는 통일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다. 양국 간 긴장은 필연적이었다.

993년, 거란은 고려가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소손녕이 이끄는 8만 대군을 보내 침공한다. 고려는 압록강 하류의 성을 지키며 맞섰지만, 전면적인 충돌보다는 타협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고려는 서희를 외교 사절로 파견하여 담판에 나섰고,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국이며 압록강 이북까지 역사적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리와 담대함에 소손녕은 이를 수용하였고, 전쟁은 평화적으로 종결된다.

특히 강동 6주(용주, 곡산, 철주 등)를 얻어내어 국방적 요충지를 확보한 점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이는 고려가 힘의 논리가 아닌 설득과 외교로 얻은 승리로, 동아시아 외교사의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2차 전쟁 (1010년)강조의 변과 개경 함락, 시련의 서막

2차 전쟁은 국내 정치 불안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1009년, 고려 내부에서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강조의 정변'이 발생한다. 이에 거란은 이를 구실로 "왕을 죽인 나라에 정의가 없다"며 침공을 감행한다.

1010년, 거란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전면전이 벌어진다. 고려군은 초반에 선전했으나, 병력의 열세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게 된다. 거란군은 개경을 불태우며 철수하지만, 이 과정에서 민간 피해와 문화재 손실이 컸다.

그러나 고려는 꺾이지 않았다. 귀국하는 거란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결국 거란은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갔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군제 개편과 성곽 수축 등 대대적인 방어 전략을 강화하였다. 2차 전쟁은 패전 같지만, 왕조의 존속과 항전 의지를 유지한 점에서 전략적 버팀목이 된 전쟁이었다.

3차 전쟁 (1018년)강감찬과 귀주대첩, 고려의 역전승

거란은 고려가 여전히 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들에 복속하지 않자 1018년 3차 침공을 감행한다. 이번엔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으며, 이는 고려를 끝장내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고려에는 강감찬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그는 치밀한 전략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고, 수차례의 기습전과 유인전으로 거란군을 지치게 만든다. 특히 흥화진 전투에서는 거란군의 진군을 막고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진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강감찬은 거란군 주력을 섬멸하며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침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양국은 이후 약 100년간 평화 상태를 유지한다. 귀주대첩은 군사적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고려가 자주국임을 분명히 한 역사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전쟁의 의미와 유산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단순한 승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려는 자주성과 체제의 독립을 지켜냈으며, 외교와 군사의 균형을 통해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특히 서희와 강감찬은 한 명은 펜으로, 한 명은 검으로 나라를 지켜낸 인물로 기억된다.

오늘날 이 전쟁은 우리에게 국가 안보의 중요성, 내부 단결의 필요성,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와 결단을 일깨워 준다.